독일에는 사교육이나 살인적인 대학입시가 없습니다. 대체로 균질의 대학들이 전국에 골고루 퍼져 있고, 원칙적으로 어떤 대학, 어떤 전공이거나 정원 제한 없이 입학시키는 정책을 택하고 있습니다. 제한 없이 입학한 학생들이 모두 성공적일 수는 없습니다. 냉정하게 평가된 성적표를 받습니다. 필수과목에서 F 학점을 받고 낙제를 합니다. 결국 적지 않은 학생들이 대학에서 중도에 탈락합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자신의 적성을 새롭게 시험할 수 있는 길이 넓게 열려 있습니다.
어차피 정원 제한 없는 입시이고, 종전의 대학입학 자격시험 점수를 평생 사용할 수 있으므로 재수, 삼수의 새로운 입시공부가 필요 없습니다. 등록금이 없기 때문에 종전 대학에 납입한 등록금이라는 경제적 손해도 없습니다. 독일 대학에 등록금이 없는 것은 특이한 제도입니다. 독일의 정치인들은 독일인들의 교육에 대한 관점을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공부를 하는 데 필요한 것은 오로지 정열과 노력뿐이어야 한다.”
그들이 보기에 이것이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내는 원초적 기둥입니다. 이 생각은 보수정당이건 진보정당이건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기본 원칙 위에서 독일의 정당들은 학생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는 정책으로 경쟁합니다. 이와 같은 정치인들의 생각에 시민들도 공감합니다.
물론 세금을 많이 내야 하는 것에 대하여는 불평하지만, 대학 학비를 받지 않는 제도에 관해서는 저항이 없습니다. 누진세에 따라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하는 부자들의 생각도, 자식들이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수공업자나 노동자층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에서도 의대 입학은 쉽지 않습니다. 의대 입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많은데, 의대정원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원이 제한되어 있고, 많은 우수한 지원자들이 가고 싶어 하는 의대는 우리처럼 최상위 성적의 학생들만이 합격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우리와 결정적으로 다른 결정이 있습니다. ‘기다리기’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입학 경로를 열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의대 정원의 60%는 공부를 가장 잘한 학생들, 아비투어에서 최고의 성적을 받은 학생들로 채웁니다. 20-30%는 의대에 들어가기 위하여 다른 길을 택한 학생들로 채워집니다. 약학과, 치과 등 의학과 관련되는 학문을 전공하며 기다리는 학생들도 있고, 구급요원 또는 요양간호사 등 유관분야의 직업을 선택하며 기다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의대 정원의 일부를 순서를 기다리는 학생들로 채운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매우 생소한 개념입니다. 의사가 된 뒤에도 혹시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거나, 의사들 내부에서나 환자들이 편견을 갖고 그들로부터 진료받는 것을 꺼리는 것은 아닐까?
저 역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일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일반인이거나 의사들이거나 그들의 대답은 대체로 동일하였습니다. “의대 공부에 적응하여 생존하였다면 그들의 자격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특히 구급요원, 간호사 등으로 일하며 기다렸던 이들은 인간의 건강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갖고 있기에 더 좋은 의사가 될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독일 사회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2017년 독일의 헌법재판소는 독일의 의대 입시제도가 헌법에 위반된다는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입법자들에게 의대입시의 다양성 강화를 촉구합니다.
성적을 기준으로 선발하는 전형의 경우도 오직 학교 성적만으로 할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 능력, 공감능력 등 다른 능력을 고려해야 하며, 기다려서 입학하는 전형도 현행 장기 7년은 지나치게 장기간이니 이를 3-4년으로 단축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의대 정원도 지나치게 적게 책정되어 있으니 확대하여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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